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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조선 인물연구 전병현 인터뷰기사 Chon byung hyun Newspaper article  
Chon byung hyun Newspaper article 
 월간조선 인물연구 전병현 인터뷰기사  
[인물연구] 벽화와 韓紙로 한국적 감성을 풀어내는 전병현
 
韓國畵의 뿌리를 생각하게 하는 보기 드문 서양화가
 
田炳鉉
1957년 경기도 파주 출생. 파리 국립미술학교 회화과 졸업. 제1회 대한민국미술대전 大賞(1982), 제2회 대한민국미술대전 우수상 수상. 8회의 개인전을 비롯해 다수의 해외전.
朴熺淑 화가·시인 (bluep60@hanmail.net)  
달항아리 속의 봄꽃들
 봄의 전령으로 세상을 울긋불긋하게 물들이는 개나리·목련·진달래가 田炳鉉(전병현·50·서양화가)의 그림 속에 가득하다. 그림 속으로 들어간 꽃들은 불멸을 얻었지만, 剝製(박제)가 되지는 않았다. 그림 속에서 꽃들은 잔치를 벌이고 있다. 
  
  「가나 화랑」 큐레이터 조의영의 평론을 들어 보자. 
  
  <田炳鉉은 하얗고 둥근 白磁(백자)와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純白(순백)의 꽃을 독특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白磁의 풍만한 모습은 마치 하늘에 떠 있는 보름달과 같고, 그 안에 뿌리를 두고 사방으로 힘차게 뻗어나가는 꽃의 가지들은 만다라를 연상시킨다>
  
  7년 만의 개인전이 열리고 있는 서울 인사동 「인사아트센터」에서 田炳鉉을 만났다. 도심에서 활짝 핀 봄을 맞이하려는 관람객들로 전시장은 북적거렸다.
  
  『우리 조상들은 달항아리를 조왕신을 모시는 부엌에 놓고 신주단지처럼 귀중하게 여겼습니다. 달항아리는 우리나라에만 있는 물건입니다. 흔하디흔한 꽃이 달항아리에 담기는 순간, 그 꽃은 한국적인 꽃이 되어 버립니다』
  
  ― 꽃 그림은 언제부터 그리게 되었습니까.
  
  『우리 동네 절의 비구니 스님이 제 그림을 보고 「왜 어두운 그림만 그리고 있느냐, 사각형 안에 아무 의미 없이 딱딱한 것만 그리고 있느냐. 꽃 한번 그려 보아라. 꽃이 얼마나 아름다운 존재인가」 라고 말씀하셨어요. 
  
  그 말을 듣고 「남자가 남사스럽게 무슨 꽃인가」라고 생각했습니다. 가까운 동산에 올라가 보니 지천으로 피어 있는 진달래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꽃을 그리는 일이 그리 어색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 다음부터 꽃을 주제로 그림을 그리게 된 것입니다』
  
  ― 이번 전시회에 나온 꽃들은 모노 톤과 화려한 색상 두 가지입니다.
  
  『모노 톤의 꽃 그림은 제가 원래 기획하고 의도했던 작품입니다. 화려한 색상의 꽃들은 전시회가 4월이라 정말 봄을 느끼고 싶어서 가볍게 생각하고 그린 것입니다』
  
  ― 그림이 예쁘네요. 
  
  『그런가요(웃음).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그림이 예쁜 그림입니다. 그리고 꽃이라는 대상은 그리기 쉬운 것 같아도 실은 굉장히 어렵습니다』
  
  ― 왜 그렇습니까.
  
  『꽃은 이렇게 그리면 누구의 그림과 같고, 저렇게 그리면 누구 풍의 작품과 흡사해져서, 정말 제 풍을 잡기 힘듭니다. 꽃을 그릴 때는 의외로 작가가 탐구해야 할 부분이 많습니다. 꽃을 그리니까 「이제 먹고살려고 꽃을 그리나 보다」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blossom mixed media, 80×100cm, 2004


  
  벽화 기법에 종이 浮彫 작업
  
  ― 壁畵(벽화) 기법을 이용해 꽃을 표현한 것이죠.
  
  『벽화 기법에 종이 浮彫(부조) 작업을 같이 하고 있습니다. 벽화 하면 로마의 시스티나 성당의 벽화를 떠올리는데, 사실은 우리나라 고구려 벽화가 실크로드를 따라 유럽에 영향을 끼쳤습니다. 고구려 벽화가 세계 벽화의 源流(원류)라고 할 수 있습니다』
  
  ― 그게 근거가 있는 얘긴가요.
  
  『파리에서 공부할 때 프랑스인 선생님이 그런 얘기를 했어요. 저는 그 말을 듣고 굉장히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분의 조수 생활을 하면서 벽화 기법을 배웠습니다.
  
  선생님은 제게 「고구려 舞踊塚(무용총) 벽화를 재현해 보라」고 했습니다. 지금도 자료를 수집해 연구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우리만의 맛이 느껴지는 방법을 찾지는 못했습니다』
  
  ― 왜 그런가요.
  
  『우리나라에는 벽화 안료조차 없습니다. 외국에서 수입해 와야만 합니다. 그래서인지 고유의 맛이 나오지 않더군요』
  
  ― 벽화 공부가 쉽지는 않았을 텐데요. 
  
  『한국 학생들은 물론이고 파리에서 미술 공부하는 동양계 학생들 가운데 벽화를 공부하려는 사람이 없었어요. 제가 동양인으로서는 유일하게 벽화를 정식으로 공부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 벽화의 특징은 무엇인가요.
  
  『灰壁(회벽)은 습기를 빨아들이면서 대리석처럼 강도가 세져서 2000~3000년을 보존할 수 있습니다. 벽화 그림은 동양화의 수묵화 기법과 유사합니다. 석회가 마르기 전에 안료를 섞어서 그림을 그리기 때문입니다』
 
초기작품 being「흔적」- oil on canvas, 1983

  
  韓紙와 黃土의 만남
 
 
 
 
종이 浮彫가 어려운 작업이지요.『시간과 노동이 많이 필요해요. 처음에 韓紙(한지) 원료를 구하지 못해 애를 먹었습니다. 지금은 한지匠(장)에게서 한지를 구입하고 있는데, 그 후에는 작품이 한층 섬세해졌습니다』
  
  ― 종이 浮彫 작업은 어떻게 이루어지나요.
  
  『浮彫를 캔버스에 붙이기 위해서는 처음 흙으로 모양을 빚어서 석고판을 만들고, 석고판에 韓紙 닥죽을 두껍게 올려 물기를 제거한 후, 그늘에서 3~4일 말린 다음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 시간이 오래 걸립니다. 工房(공방)이 없어 혼자 작업을 하다 보니 전시 기간을 놓쳤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7년 만에 전시회를 하는 겁니다』
  
  ― 제 주변에 韓紙의 매력에 빠진 화가들이 많습니다. 
  
  『韓紙의 매력은 은은함에 있습니다. 韓紙는 정말 좋은 재료지만 단조롭습니다. 저는 자연미를 강조하기 위해 韓紙의 색과 가장 어울리는 黃土(황토)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오랜 시간이 걸리는 제 작업과, 오랜 세월 동안 먼지가 쌓여 형성되는 황토의 이미지가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 석고판에 韓紙로 밑작업을 하면 작품이 판화처럼 되지 않을까요.
  
  『석고는 하나의 과정입니다. 저는 작업이 끝난 후 석고판을 깨뜨려 버립니다. 지금까지 작업한 것이 아깝다고 그것을 계속해서 사용할 수는 없지요』
  
  ― 작품의 質感(질감)이 너무 강하지 않나요.
  
  『韓紙 浮彫 작업을 한 위에 황토를 바르면 두꺼워져서 그렇게 보이는 것입니다. 대신 모노 톤의 단조로운 색을 사용하기 때문에 서로 보완이 됩니다』
  
  화가 田炳鉉은 경기도 파주에서 田壽烈(전수열)씨와 薛占禮(설점례)씨의 2男1女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고등학교 시절 미술선생님이었던 박복규 現 성신女大 교육대학장의 권유로 그림을 시작했다. 高3 때 부친의 죽음으로 가정형편이 어려워져서 美大 진학을 포기한 田炳鉉은 제대 후 박복규 선생의 畵室(화실)에서 기숙하면서 그림을 공부했다. 
  
  
  高卒 출신으로 미술대전 大賞 수상
  
  1982년 대한민국미술대전에서 大賞(대상)을 받으면서 화려하게 미술계에 등단했다. 
  
  『공부를 더 하기 위해 박복규 선생님의 畵室을 그만두었습니다. 후배들과 함께 견지동에 화실을 차렸지만, 1년 만에 화실 보증금을 다 까먹고 있었습니다. 막바지에 몰려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후배가 「공모전에 출품해 상금을 받으면 급한 불을 끌 수 있다」고 해요. 
  
  갯벌의 풍경을 연극 세트장 만들 듯이 하나하나 연출하면서 그린 極寫實畵(극사실화)를 출품했습니다. 운송비를 아끼기 위해 후배와 함께 현대미술관이 있던 덕수궁까지 그림을 직접 들고 갔어요. 거기서 다른 화가들의 그림을 보니, 무척 잘 그렸더군요. 
  
  후배에게 「참가비가 아까우니 그냥 돌아가자」고 했습니다. 후배는 「힘들어서 작품을 들고 돌아갈 수는 없다. 출품할 수 없다면 그림을 버리고 가자」고 버티더군요. 그래서 출품하게 됐습니다』
  
  상금으로 밀린 화실비를 냈지만 경제사정은 그다지 나아지지 않았다. 1년쯤 지나니까 상황이 그전과 같아졌다. 高卒 출신이 大賞을 받은 데 대해 『누가 그림을 대신 그려 준 것이다』, 『상을 잘못 주었다』는 등 뒷말이 많았다고 한다. 
  
  미술대전에서 大賞을 받으면 그 다음부터는 미술대전에 출품하지 않는 것이 당시 미술계의 관례였다. 田炳鉉은 그 관례를 깨고 이듬해 다시 출품해 우수상을 받았다. 
  
  『화단에 떠돌아다니는 말을 듣고 속이 많이 상했고 오기가 생겼습니다. 「다시 한 번 내 실력을 입증해 보여 주고 싶다」는 생각에 다시 그림을 출품했습니다. 당시에는 「高卒 출신」이라는 열등감이 많았습니다』
  
  미술대전에서 大賞을 받으면 작품성을 인정받아 금방 그림이 팔리던 시기였지만, 高卒 출신의 신출내기 화가던 그와는 상관없는 얘기였다. 
  
  마침 인사동에서 가나 화랑을 연 이호재 사장이 그에게 『시간이 지나고 나면 미술대전 大賞은 중요하지 않다. 앞으로가 중요하다. 파리에 가서 못 다한 공부를 하라』고 권유했다. 
  
  이호재 사장은 그에게 매달 500달러의 유학 비용을 지원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이호재 사장은 『나중에 그림이 좋아지면 그때 받을 테니 걱정하지 말고 가라』고 했다. 이호재 사장과 이야기를 나눈 지 일주일 만에 田炳鉉은 프랑스 유학길에 올랐다.
  
  『「무작정 뛰어들어 보자」는 마음으로 유학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제일 어려웠던 것은 프랑스語였는데, 급하니까 귀가 열리더군요. 제 프랑스語는 일상생활을 하면서 익힌 「카페 佛語」입니다.
  
  처음 5개월 동안 送金(송금)받는 방법조차 몰라 고생했습니다. 몽마르트르에 한국 유학생들이 단골로 묵는 호텔이 있었는데, 그 호텔 주인이 봐준 덕분에 5개월을 견딜 수 있었습니다. 숙식을 할 수 있는 그 호텔에서 그림을 많이 그렸습니다. 5개월 후 아트페어 참석차 파리에 온 이호재 사장이 밀린 돈을 한꺼번에 주시더군요. 그 후 정기적으로 송금을 받아 공부할 수 있었습니다』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파리 국립미술학교에 입학한 그는 열심히 그림만 그린 덕분에 3년 반 만에 졸업할 수 있었다. 전시회에는 한 번도 참여하지 않았다. 이 시절 그는 李應魯(이응노·1904~1989) 화백을 만났다. 
  
  
  李應魯와의 만남
 
李應魯 화백과 파리에서.

  ― 反체제 인사였던 李應魯 화백을 가까이 하는 게 쉽지 않았을 텐데요. 
  
  『처음에는 그가 反체제 인사라는 것조차 몰랐습니다. 파리에서 李應魯 화백의 전시회를 본 후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를 만나고 싶어 李화백의 조카가 운영하는 식당을 찾아갔습니다. 그의 소개를 받아 李應魯 화백을 만났습니다. 「15년 만에 한국 국적의 유학생이 찾아왔다」며 눈물을 흘리시더군요. 
  
  파리 유학생들은 선생님을 뵙고 싶어도 한국 사회의 경직된 분위기 때문에 그러질 못했습니다. 저는 그런 것에는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다만 선생님의 작품이 좋았을 뿐입니다.
  
  그분 덕분에 韓國畵(한국화)를 처음으로 접할 수 있었고, 韓紙를 이용한 작품에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韓紙를 이용한 작품을 졸업작품으로 출품했습니다』
  
  ― 파리 국립미술학교 졸업자라면 프랑스 화단에 진출할 기회가 많았을 텐데요.
  
  『유럽의 화랑들은 파리 국립미술학교를 졸업하면 그 가능성만 보고 전속계약을 맺습니다. 저도 파리에 있는 조그만 화랑에서 전속계약을 맺자고 연락이 왔습니다. 하지만 머물고 싶지 않았습니다. 동양의 작은 나라인 한국 출신 화가는 파리 국립미술학교를 졸업했다고 해도 귀화하면 모를까, 그렇지 않고서는 2류·3류 화가에서 벗어나기 힘듭니다. 
  
  3년 이상 프랑스에서 살아 보면 누구나 느끼게 되는 얘깁니다. 프랑스라는 옷이 저에게 맞지 않다고 느껴 귀국을 서둘렀습니다』
  
  ― 더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는지요.
  
  『한국으로 들어올 때에는 나중에 현대미술의 메카인 뉴욕에서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국내에서 2년 정도 있다 보니 굳이 미국에서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없어졌습니다. 
 
파리 유학시절 조각가 세자르 교수의 작업실에서.

  「예술가는 피라미드 안에 있는 사람」이라는 프랑스 유학 시절 은사님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예술가로서 가장 정점인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가장 밑바닥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그 안에서 돌고 도는 것이다. 100년을 사는 사람이 앞으로 나간다 해도 거기서 거기다」라는 말씀이었습니다』
  
  ― 귀국 직후에는 한국적인 소재로 작품활동을 하지 않으셨죠.
  
  『당시에는 한국적인 소재로 작품활동을 해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세계는 하나인데 왜 굳이 예술에서 국적을 따지는가」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지금처럼 벽화 기법이나 韓紙를 사용하지 않고 다양한 재료에 심취했습니다. 3년 정도 지나니까 정리가 되더군요. 그 다음 「歲寒圖(세한도)」를 주제로 소나무를 그리면서 韓紙를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 한국적인 소재에 관심을 가지게 된 동기는 무엇인가요.
  
  『조선시대의 圖畵署(도화서)를 생각했습니다. 日帝 강점 이후 서양화가 미술계에 급속도로 수용되었습니다.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 할 문화가 여과 과정을 거치지 않았습니다. 
  
  어느 순간 우리 미술은 없어지고 서양 미술이 득세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런 모습을 보니까 우리의 고유한 맛을 표현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미술사학자 박정욱의 이야기를 들어 보자. 
  
  
  한국적인 소재로 한국적인 맛 표현
 
 
 
 <田炳鉉은 韓國畵의 뿌리를 생각하게 하는 보기 드문 서양화가다. 그의 작품들이 가장 한국적 소재와 한국 미술의 기법을 다루고 있는 것은 특이할 만하다. 이 점은 유럽 미술을 근거로 近代 미술을 발전시켜 온 한국이란 독특한 예술 환경에서 한번 짚어 볼 가치가 있는 점이다. 
  
  한국 현대미술은 과연 뿌리가 있는가? 田炳鉉의 작품들은 뿌리 그 자체에 대한 작가의 內的 정리과정에서 나왔다. 田炳鉉의 작품을 통해 한국화의 정신적 뿌리, 형과 색과 선의 시간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곧 상실된 近代를 다시 회복하기 위한 시도일 수 있다>
  
  田炳鉉의 「歲寒圖」 連作(연작)은 미술계의 뜨거운 반응을 일으켰다. 유럽 전통 미술을 배웠음에도 불구하고 가장 한국적인 재료와 소재로 한국적인 맛을 표현했기 때문이다. 
  
  그가 열린 시각으로 한국 미술을 바라볼 수 있었던 것은 미술대학을 졸업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는지 모른다. 스펀지처럼 모든 것을 빨아들일 수 있었던 환경이 그에게 축복이 된 것이다. 
  
  ― 2000년 전시회에서 작품의 주조색이 白色으로 바뀌었죠.
  
  『白色의 작품들은 아주 평면적인 작품입니다. 그때부터 유백색의 도자기 빛에 반해서 사람들이 「언제 그림을 그릴 것이냐」라는 말을 할 정도로 白色으로만 표현했습니다. 하지만 「極과 極은 통한다」고 생각해 극사실화인 초상화를 함께 그렸습니다. 
  
  조선시대 때 선비들이 생각하는 가장 성스러운 色이 白色입니다. 고려시대 청자의 色은 복스러운 色으로 무덤까지 가지고 들어가는 色이고, 조선시대 白色은 정신세계로 들어가는 色입니다. 白色은 사람들의 心性을 대변하는 色이지요. 그래서 白色의 도자기가 조선시대에 발달하게 된 것입니다. 
  
  벽화를 공부하면서 자연스럽게 白色을 접해 보았고, 한국에 돌아와 유백색의 도자기를 보면서 빠져들었습니다. 白色이 가장 소박하게 다가갈 수 있는 소재가 자연입니다』
  
  田炳鉉은 2000년부터 인터넷 홈페이지(www.iloveart.biz)에 그림일기인「싹공일기」를 연재해 왔다. 그의 온라인 팬은 1만 명에 달한다. 2003년에는 그때까지 연재됐던 내용들을 모아 책으로 펴냈다.
  
  『예술품은 항상 부담 없이 우리 곁에 있어야 합니다. 예술은 사람의 흔적입니다. 어려울 때 힘이 되고, 즐거움을 주고, 미래를 제시하며, 사람에게 느끼라고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것을 느낄 수 있게끔 도와주는 활력소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화가인 저도 과천에 있는 국립현대미술관을 특별한 일이 없고서는 찾지 못합니다. 하물며 일반 국민들, 특히 지방 주민들이야 오죽하겠습니까? 
  
  인터넷은 사람들이 어렵게 생각하는 미술을 대중과 함께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매체입니다. 화가들은 캔버스만 고집할 것이 아니라, 대중들과 함께 그림을 즐겨야 합니다』
 
파리 비트리 작업실에서 동료들과 함께.

  
  결혼반지를 팔아 시작한「싹공일기」
  
  ― 인터넷을 작품을 판매하는 공간으로 활용하는 것은 아닌가요.
  
  『그림을 사고팔기 위해 인터넷을 이용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식으로 접근하면 그림은 대중들 속에서 살아 숨쉬는 것이 아니라 죽은 예술이 되어 버립니다.
  
  저는 인터넷을 통해 「한 사람이 이렇게 다양하게 그림을 그릴 수 있구나」하는 것을 보여 주고 싶었습니다. 2000년 제가 「싹공일기」를 시작할 때부터 함께한 네티즌들은 지금 미술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습니다』
  
  ― 컴퓨터를 이용하는 데 어려움을 겪지는 않았나요.
  
  『컴퓨터를 사기 위해 결혼반지를 팔았던 게 아내에게 아직도 미안합니다. 컴퓨터를 몰라 아내에게 잔소리 들어 가며 밤새워 공부를 했죠.
  
  사실 제가 사람 만나기를 싫어하는 체질입니다. 인터넷은 저의 그런 점과 딱 맞아떨어졌습니다. 제 페이지를 이용하는 네티즌들이 자료를 요청하면 언제든지 이메일로 보낼 수 있어 편리합니다』
  
  ― 「싹공일기」의 「싹공」은 무슨 뜻인가요.
  
  『「싹」은 「초하루 삭(朔)」을 硬音(경음)으로 발음한 것입니다. 그믐달을 뜻하지요. 「공」은 원, 즉 「滿月(만월)」을 뜻합니다. 「싹공」은 「차면 이지러지고, 이지러지면 다시 찬다」는 의미입니다. 「어려우면 다시 찰 것이고, 차서 자만해지면 다시 작아질 것」이라는 뜻이죠. 제가 살 방향입니다』
  
  
  오전10시부터 2시간 동안 인터넷
  
  ― 자신의 이야기를 솔직하게 글로 쓰기 쉽지 않았을 텐데요.
  
  『처음에는 글 없이 그림만 인터넷에 올렸습니다. 그러니까 회원들이 그 의미를 물어보기 시작하더군요. 그래서 남의글을 제 그림과 함께 엮어 보았지만,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잘 쓰지는 못하지만, 직접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살면서 느끼는 것들을 편안하고 솔직하게 쓰고 있습니다. 글 쓰는 친구들이 가끔 「맞춤법이 틀린다」고 면박을 주지만 그게 어떻습니까. 그림 설명을 억지로 하지 않고 그림을 그리면서 느꼈던 것을 보여 주려고만 하고 있습니다』
  
  ― 인터넷에 너무 시간을 빼앗기는 것은 아닌가요.
  
  『교직에 계시는 분들은 시간이 많이 필요하겠지만, 저 같은 專業(전업)화가는 아침에 할 일이 없습니다. 오후부터 그림을 시작해도 엉덩이가 아플 정도입니다. 오전 10시부터 시작해 한두 시간만 인터넷을 합니다』
  
  ― 900회를 연재했는데 힘들지 않나요.
  
  『억지로 보여 주려고 하면 힘들어서 연재하지 못합니다. 가볍게 생각나는 대로 그림을 그려서 올리고 있습니다. 제가 작품성만을 고집해서 작품을 올린다면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 수 없었을 것입니다』
  
  파리에서 돌아올 때만 해도 장차 뉴욕으로 유학을 떠나려 했던 그의 마음을 붙잡은 사람이 있다. 부인 李炫姃(이현정)씨다. 李炫姃씨와 슬하에 女恩(여은)·煇商(휘상) 1男1女를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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